1월 1일
삼수공의 조그만 영정을 봉심하고 幅端(폭단)을 보수하고 影櫃(영궤)를 사당 탁자위에다 옮겨 안치했다.
16일
족숙 우성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9일
밤 7~9시 사이에 서북방에서 혜성이 나타났는데 `莽(망)'자처럼 크고 꼬리에서 뼏어나는 빛이 강렬했다.
24일
계집종 김봉순이가 쪽을 쪘다.
3월 9일
둘째아들의 관례를 지루었다. 어려서의 이름은 角眞(각진)이고 계미 3월 9일생이며 이름은 準桓(준환), 자는 公寧(공령)이다.
11일
둘째아들이 장가를 들었는데 며느리는 고령 신씨로 동갑니다. 남원 택존에 사는 신씨집에서 再請使(재청사)가 왔다.
5월 6일
장수를 축하하는 시문을 지었으나 끝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족종 우성씨가 나에게 장수를 축하하는 시문을 부탁했는데 그이 아버지 호는 琴翁(금옹)이며 계사생의 순박한 노인이다.
아울러 `二山墨圖(이산묵도)'를 주어 도려보냈다. 머리 이사와 서로 의지하고 산 지 어언 6년이 지났건만 또 이렇게 헤어져야 하니 서글푼 마을을 어이하랴?
오언 율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8월 14일
종재 殷中(은중)의 아들 長壽(장수)가 어린나이로 서울에 살고있다.
9월 3일
왕사찬과 진사 황현이 찾아왔다.
11일
고조모 정부인 양천허씨의 묘제일로 산소는 곡성 석곡면 용주동이 있는데 원래 이날로 제일이 정해져 있으므로 둘째아이를 대리고 어재 길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남원 땅을 들리까 생각중이다.
19일
아버지 묘를 개장한 지 어언 5년이 지났지만 거듭 염려가 되어 풍수지리에 안목이 있는 친구 오한서와 동행하여 성묘했다.
10월 13일
종재 제만의 아들 공진이가 갑오년 정월에 여산 관아로 갔다가 이제야 비로소 그의 모친을 뵈러 왔다. 따라서 관례식이 놎어졌으나 행동거지는 흡사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
11월 6일
둘째 머느리의 干歸(간귀)일이다.
12월 22일
머리의 종기로 몹시 괴로와 금목단 2개를 먹었는데 너무 독새 곧 그만두었다